[팩트체크] 대한제국군 일천여명이 간도를 공략하였다는 낭설에 대해


[팩트체크] 대한제국군 일천여명이 간도를 공략하였다는 낭설에 대해

하연하연 0 1430

1. 왜 간도에서 분쟁이 발생하였나??


 - 청나라 성립 이후 간도지역은 청나라의 발현지라 봉금(封禁)지역으로 묶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 그러다가 1800년대 후반부부터 알음알음 조선인들이 들어가 개간을 하며 살게 되면서 조선과 청나라간 분쟁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 청과 조선간 경계선인 토문강이 과연 두만강이냐 아니냐로 청나라와 대한제국간  논쟁이 벌어졌고 이와 동시에 변경지대에서는 각기 자신의 관할이라며 지속적인 분쟁이 발생하였다.



- 중간 생략 : 청과 조선간의 국경선 분쟁은 나중에 다뤄볼 예정이다




2. 대한제국군 1천명이 청나라를 침략했다는 내용들


하여간 청 / 대한제국간의 국경분쟁이 끊이지 않던 1903년 12월, 청국에서 항의문이 하나 날아온다.


"조회(照會)

대청 흠차 출사 대신(大淸欽差出使大臣) 허태신(許台身)이 조회합니다. 중국력 10월 1일과 2일 연이어 우리 외무부(外務部)의 전보를 받았는데, 한국 병사가 강을 넘어 길림(吉林) 변경에서 소란을 일으킨다는 내용이었고, 이에 대해 귀 대신에게 요청하여 즉각 대황제께 상주해서 이를 금한다는 특별 칙령이 내려진 바 있습니다. 10월 8일에 재차 우리 외무부의 전보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경 장군(盛京將軍)의 전보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임강현(臨江縣)의 보고에 따르면 〈9월 4일 한국 병사가 1,000여 명을 이끌고 강을 건너 장생보(長生堡)를 공격했고, 한국 관리는 강변 일대가 모두 한국 땅이라 칭하면서 집을 불태우고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했을 뿐 아니라 노약자와 어린아이들을 살해하였습니다. 또한 경전보(慶田堡), 간구자(干溝子), 상위자(上峗子) 지방 또한 한국 삼영성(三永城)의 병사들에 의해 세 집이 불태워졌습니다. 이전에도 한국 관리 서상무(徐相懋)가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와 관아를 지으려고 하다가 저지당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이들이 창궐하니, 아마도 모종의 주모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병사의 월경과 소요는 봉천성(奉天省)과 길림성(吉林省) 두 지역에서 동시에 발생했는데, 그 정황을 보면 실로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한국 대사(大使)에 이를 알림과 동시에 다시 외무부에 알려서 양국의 순망치한의 관계에 비추어 이해 관계를 잘 살펴 분란의 소지가 발생하지 않게 하도록 절실히 설득해야 합니다.’"

<출처 :http://db.history.go.kr/id/sk_026r_0010_0120_0020_001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데이터베이스>


 주한청국공사였던 허태신이 보낸 항의문이다. 이 내용이 퍼지고 퍼져서 결국 아래와 같이 발전하게 된다.




 2-1. 나무위키


간도.JPG [팩트체크] 대한제국군 일천여명이 간도를 공략하였다는 낭설에 대해

 - 그나마 나무위키는 위 항의문 내용에 크게 차이가 없이 기술하고 있음



 2- 2.  팸코를 비롯한 기타 인터넷 사이트


 간도_2.JPG [팩트체크] 대한제국군 일천여명이 간도를 공략하였다는 낭설에 대해
간도_3.JPG [팩트체크] 대한제국군 일천여명이 간도를 공략하였다는 낭설에 대해

  - 기타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15번 싸워서 15번 이겼다는 등, 청군에 백전백승, 참호전, 창기병이 나오고 게틀링에 독일제 야포까지 등장한다. 

  - 심지어 고종이 북간도 일대를 병합하는데 성공했다고까지 한다.




간도_팸코.JPG [팩트체크] 대한제국군 일천여명이 간도를 공략하였다는 낭설에 대해

간도_팸코_2.JPG [팩트체크] 대한제국군 일천여명이 간도를 공략하였다는 낭설에 대해
 - 며칠전 팸코에서 올린 내용으로는 봉천과 지린 두 성의 청국병영을 공격해서, 5백명을 사살하고, 19,546냥의 재산손실을 나게 했다는 주장이다. 또한 간도거주 조선인과 대한제국 경찰대까지 합세하였다 한다. 
 



   그렇다면 위 내용이 과연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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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나라 항의문에 대한 대한제국의 답변.


 위 항의문에 대해 대한제국에서는 이렇게 답변한다.



조복(照覆)
조복합니다. 조회문에 우리의 병사와 백성들이 연길(延吉) 소속의 사창(社倉) 화거산(和據山)에 있다는 내용, 그리고 우심산(牛心山)에서 관문을 설치해놓고서 무기로 무장한 채 통행료를 받는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또한 간악한 백성들을 규합하여 공격하고 방화를 행하였고, 우리 군사 7~800명이 화룡욕(和龍峪)의 군대를 공격했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한국 달력으로 지난달 21일과 이번 달 4일에 연이어 위의 내용을 담은 귀측의 조회를 접했고, 이에 곧바로 해당 관청에 문서를 보내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 후 원수부에서 보내온 문서를 받아보았는데, 

변계에 병사를 둔 것은 단지 방어를 위한 것일 뿐이고 제멋대로 옮겨 다니는 것은 허락지 않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청국의 변발을 한 무리들이 먼저 내침에 와서 종종의 변경을 지키는 병사들을 들쑤시고 다니는 등의 조약위반 행위를 했고, 이에 법률에 의거하여 합당한 조치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함경북도 관찰사(咸鏡北道觀察使) 이윤재(李允在)가 전보를 보내왔는데, 무산(茂山)의 병민(兵民)들이 청국 병사와 다툼이 있었던 것은 참령(參領), 교계관(交界官)과 청국 관리가 회동하여 평화롭게 마무리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어서 함경북도 교계관 최남융(崔南隆), 김병약(金炳若) 등이 보고하기를, “무산 맞은 편 언덕의 간도 거민 수천 호가 청국 관리들의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변발을 한 비적들의 약탈을 당했습니다. 이에 조회문을 보내 이 점을 공박하고 순찰을 배치하여 단속했습니다. 음력 8월 하순 그 부근에 거주하는 청국인 장서유(張瑞有), 강기순(江起順), 양덕승(楊德勝), 조유산(曺有山) 등이 도당을 모아 관병을 사칭하며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또 무기를 휘두르며 무산의 주둔군을 향해 격문(檄文)을 발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기에 

절박한 상황에서 군대를 출동시켜 발포하고 방어선을 굳건히 지킴으로써 그들이 대안으로 넘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지 벌써 몇 달이 지난 것입니다. 저 흉악한 비적의 무리들이 먼저 도발해왔기에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응전했고, 이에 사상자가 발생한 것입니다.

9월 하순에 이르러 그 비적들은 상황이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하고서 퇴각하였지만, 월간(越墾)하던 우리 백성들의 집과 곳간을 불태워 모든 재산을 훼손시키고 약탈하는 등의 패악을 저질러 마을 전체가 어수선한 형국입니다. 이들 백성들은 무산으로 돌아왔지만, 그 비적들은 강안(江岸) 근처에 다시 와서 습격하겠다고 성언(聲言)하였고, 이에 군대가 난민등과 합세하여 비적들의 소굴을 파괴하자 비적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강의 북쪽으로 흩어졌습니다. 상강 분서 총순(總巡) 안수익(安壽益) 역시 여러 차례 상황의 위급함을 보고하였지만,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고 무기도 없어 원조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누차 염탐군을 파견함과 동시에 공문을 발송하여 대국을 서술하고 이치에 맞게 반박하면서도 결국은 화평으로 돌아가자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이에 청국 관원과 날짜를 정해 회동하여 분쟁을 평화리에 수습하자는 취지의 공문을 보낸 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음력 9월 26일에 이르러 본 관은 진위대 참령 서정규(徐廷圭) 등과 위관들을 이끌고 무산 군수 지창한(池昌翰), 종상 군수 주철준(朱哲濬)과 함께 종성의 강변으로 갔고, 청국 동불사(同佛寺)에 있던 통령(統領) 능유기(凌維琪), 연길청 이사(延吉廳理事) 진작언(陳作彦), 분방(分防) 장조기(張兆麒) 등과 함께 회담을 개시했습니다. 청국 관리들은, 현재 무산 대안 일대의 분쟁이 군대와 군대 간의 충돌로 상호 간에 살상이 일어났으니 이제 휴전을 하고 화평한 상태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중략- . 이에 각 동민(洞民)들이 입은 재산피해 목록을 작성하여 한성에 거주하는 청국공사에 보내 일일이 변상받도록 해야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본 대신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이번 약탈과 분쟁은 청국인들이 먼저 도발하고 우리 백성들이 응전한 것입니다. 귀측의 봉천 장군이 보낸 문서에서 말하는 “우리 병사와 백성” 운운한 것은 사실과 같지 않은 줄 압니다. 

                    - 중략 - 
1903년 12월 14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id/sk_026r_0010_0120_0140_0030)



  



대한제국의 답변요약

  - " 전투가 있기는 했으나 니네가 공격해와 반격한 것일 뿐, 우리가 넘어가서 공격한 것이 아니다"라는 답변

  

그렇다면 이 답변은 단순한 체면치례용으로 보낸 답변일까 아니면 실제로 그러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대로 보낸 답변일까?





4. 대한제국 내부 문건으로 본 사실 확인


 

  4-1 : 함경남북도 내거안 

本郡對岸의 淸人輩가 賊黨과 체결하여 會城에 官砲를 설치한다며 약탈을 專行한다고 三水郡守 李敏重이 보고하여 會城砲 名色을 철거해 달라고 照會했더니 제5호 指令에 해당 지명을 지적하지 않았으니 三水郡에 飛飭하여 다시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한 바 해당 군수의 報告書 내에 會城砲의 留屯地名은 吉林 소속의 신설한 臨江縣 本通化縣 구역 十六道溝 長生保 內失弓으로 本郡의 仁遮外社 對岸의 大東社라고 함


양력 9 17‚ 음력 7 25일 本隊尉官 金商說이 어제 初昏 무렵 淸匪와 밤새 교전하였고 이튿날 甲山中隊와 雲寵駐隊에 應援을 請兵하였는데 25일 雲寵駐隊 尉官이 兵 30名을 거느리고 本郡에 도착하여 羅暖阨口로 갔다고 해당 郡守가 보고했고‚ 



양력 9 22일에는 음력 7 27일 偵探巡校 李學根이 淸匪와 我兵이 교전했다고‚ 음력 8 2일 偵探巡校 千萬億이 兵砲가 撤還한 후 淸匪 등이 新農社 등지를 橫行하여 潰散之民이 保命할 姑息之計로 淸匪의 流下木을 180里 운반해 주었고 만약 다시 교전하면 후환이 없지 않을까 두려워 退駐를 청하여 甲·雲 兩隊가 부득이 撤還했다고 알려왔다고 해당 군수가 보고했음



또한 양력 10 15일 해당 군수의 報告書에 음력 8 24일 淸匪 50여 명이 越境하여 隊所를 포위하고 洋銃을 亂放하여 隊兵이 사방으로 도망하고 回龍銃 34‚ 彈丸 및 我人 3‚ 牛隻 4‚ 公錢 日圓 103‚ 純錢 180여 兩을 모두 약탈해 갔다고 하며‚ 양력 10 23일의 報告書에 淸匪 등이 內失弓에 留屯하여 本駐隊 尉官 金命山과 甲山出駐 尉官 崔喜錫이 각각 1小隊‚ 山砲頭領 成世逸이 山砲 73名을 거느리고 出邊하여 음력 9 4일 淸匪와 종일 交戰했다고 



한 바 이를 조사한 즉 淸匪輩가 兩國의 敦誼를 생각하지 않고 침략한 것이니 즉시 淸國公使에게 知照하여 淸匪侵掠의 폐단을 엄금하게 하고 그들이 奪去해 간 我人 3‚ 回龍銃 34‚ 公錢日圓 103‚ 葉錢 185‚ 牛隻 4首를 즉시 推還하게 해달라는 내용.(

1903 11 21).

 출처 : 『咸鏡南北道來去案』 000217983-v.1-2, 044a-044a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http://kyudb.snu.ac.kr/book/text.do?book_cd=GK17983_00&vol_no=0002)

 

  요약


  - 운룡주대 약 50명 + 갑산중대 약 50명 + 산포 73명 = 총 173명이 청나라 비적과 교전


  - 결과 : 3명 납치됨 + 회룡총 34정 + 공금 103원 + 엽전 185년 + 소 4두를 약탈당함

 



  4-2 : 함경남북도 내거안 



      

茂山郡 對岸의 墾島居民 幾千幾百 戶口가 淸官의 勒歛과 鬍匪의 搶掠을 감당하기 곤란한데 음력 8월 念後 淸人 張瑞有‚ 江起順‚ 楊德勝‚ 曺裕山 등이 徒黨을 불러모아 官兵을 詐稱하고 出兵하여 婦女縛과 民産搶掠을 일삼을 뿐만 아니라 揮軍交鋒之意으로 茂山分駐隊站에 격문을 보낸 까닭에 隊는 兵을 보내고 郡하 역시 砲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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