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외 사정 (약간 스압)
친구 이름을 내키는 대로 부르는 건 힙합 정신이다. 불만을 토로하는 거다. 물론 스스로 계속 이름을 바꾸는 힙합퍼도 있다. 퍼프 대디였다가 피 디디였다가 말이다. 여하튼 내 이름이 균형이 맞지 않다며 성과 이름 중간 글자만 붙여 말하는 친구가 있었다. 처음에는 황당했다. 한 번도 이름의 균형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계속 그 애칭이 불리고, 익숙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이름이 밸런스가 맞지 않다고 한 친구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별로 생각해보지 않은 영역을 맞닥뜨렸을 때 상대가 강하게 밀어붙이면 저도 모르게 동조한다. R이란 남자를 만나고 첫 섹스 직전이었다.
“나는 한 번도 콘돔을 써본 적이 없어.”
“...혹시 잘못되면 어떻게 해?”
나는 엄청나게 화가 났지만 도리어 차분하게 말하는, 방어기제가 작용했다. 그는 픽 웃더니 이전에도, 그 이전에도 콘돔 없이 섹스만 잘 했다며 믿으란다.
“나란 남자는 믿지 마. 근데 내 아래쪽은 믿어도 돼.”
자신의 사정 조절 능력이 오차 범위 0.0001% 명품 스위스제 시계의 타이밍이라도 되는 것 마냥 자부심이 대단했다. 게다가 스스로 나쁜 남자라고 딱 까발리기까지. 나는 약혼자도 있어, 라는 ‘폭탄’을 침대에서 맞았다. 이미 우린 옷을 다 벗고 있었다. 가족 드라마의 ‘캔디’ 같은 야무진 여자라면 사리에 맞는 일장 연설 후에 남자를 밀어냈을 테지. 하지만 나는 순간의 욕망에 굴복했다. 어차피 오래 만날 사이도 아닌데, 몇 번은 안전할 거야, 하고 자기기만을 하면서 R과 잠자리를 가졌다.
즐거운 순간은 금세 지나가지만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몸에 차곡차곡 쌓인다. 안 그래도 불규칙한 생리주기가 콘돔을 쓰지 않는 남자로 인한 스트레스 덕에 예측불가능이었다. 피임약을 먹을 시점을 놓치는 동안 몇 번이나 더 그와 섹스를 했다. 무엇보다 남자의 사정 타이밍 따위에 ‘미래’를 건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았다. 정확히 두 달 반이 지나서야 생리가 돌아왔고, 바로 그 남자와 헤어졌다.
지금은 인터넷 검색 하나로 원하는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90년대를 통과한 아이들은 정보를 얻으려면 발품을 팔아야 했다. 섹스 정보도 마찬가지다. 나는 강의가 비면 가끔 중앙도서관에 가서 섹스 관련 도서들을 검색했다. 대출하면 카드에 기록이 남으니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메모를 하곤 했다.
그리고 21세기 세상. 매일, 모든 것이 눈부시게 바뀐다. 3D 프린터로만 5층 아파트를 만들고, 하늘을 나는 1인 비행 장치 제트팩 Jetpack이 시중에 나온다. 하루가 다르게 모든 것이 진화하는데 왜, 아직도, 절정 전에 성기를 빼는 걸 피임법이라 여기는 ‘원시인’이 있는 걸까?
예전에 서울의 모 대학신문 편집팀과 짤막한 섹스 문답 인터뷰를 했는데, 그 질문지를 받아 들고 한동안 울적했다. 내 일상에 섹스를 포함시킨 순간부터 오랫동안 혼자 끙끙 앓던 이슈들이 아직도 그 문답에 들어있었다. 아래는 질문 내용 중 하나다:
Q. 많은 학생들이 피임법으로 질외사정을 택하는데 질외사정은 임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정을 하지 않아도 전립선 액만으로도 임신이 가능한가요?
질외사정은 말 그대로 절정 직전에 페니스를 질에서 빼내어 사정하는 것이다. 전문의들이 피임법으로 질외사정을 추천하지 않는 이유는 페니스를 빼는 타이밍을 놓치기 쉽고, 또 흥분했을 때 남자의 전립선 액에 정자가 있을 가능성도 있어서다. 2011년, 미국 뉴저지 헐 앤드 프린스턴에서 테스트한 리서치에 따르면 27명의 남자 중 37%가 사정 전 전립선 액에 정자를 포함하고 있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니 우연한 임신을 바라는 사람들에겐 질외사정이 정말 딱이다(?).
언젠가 남자친구와 노래방에서 퀵 섹스를 했다. 그것도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불투명한 노래방 창문 너머로 누가 쳐다볼까 시작부터 온몸에 소름이 돋고 섹스 내내 불길한 상상을 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절정을 느낀 남자친구가 급하게 페니스를 빼다 정액이 내 몸은 물론, 노래방 구석구석에 튀는 바람에 부랴부랴 시간을 연장하고 우리의 ‘흔적’을 닦느라 고생했다. 엉뚱한 곳에서 청소만 하는 것으로 그 날 질외사정 해프닝이 마무리된 건, 다시 생각해도 하늘이 도우셨다. 아무리 섹스가 좋아도 수명을 단축시킬 법한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하는 건 좀 아니잖아. 그 날 이후 콘돔은 내게, 단순히 피임법이 아니라 심신의 안정을 돕는 힐링 도우미가 되었다.
No Condom, No Sex를 필생의 만트라인 양 읊어대도 불안전한 섹스를 한 나의 과거는 남아있다. “뭘 보고 그때 R을 믿었어요?” 하고 누군가 물어본들 ‘제대로’ 대답하긴 힘들다. 얼굴이 마음에 들었고, 키스를 너무 잘 해서 그랬다고 어떻게 말하냐. 스스로 멍청했다고 인정하는 일은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을수록 더 힘들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팁을 계산하기 위해 내 남자가 지갑을 꺼낸다. 벌려진 지갑 안, 사진을 끼워놓는 투명한 앞주머니에 콘돔이 보인다. 준비성이 철저한 남자다. 언제 어디서 우리가 눈이 맞아 누울지 모르니 말이다.
이 남자는 믿는다. 그가 나를 향한 마음, 사랑. 하지만 그의 성기는 믿지 않는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