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 동결 풀어도 이란은 여전히 한국이 밉다
“(이란 원유 판매대금으로 국내에) 동결돼 있는 자금 이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9월 4일 호세인 아미르-압돌라히안 이란 외교부 장관과 전화 통화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8월 미국의 대(對)이란 경제제재 때문에 한국에 동결돼 있던 70억 달러(약 9조3450억 원) 규모의 이란 원유 결제 대금의 이체가 허용된 것에 따른 후속 조치를 신속히 이행하겠다는 뜻이다.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은 예외적으로 국내 이란 동결 자금의 이체를 허용했다. 같은 시기에 해당 조치와는 별개로 당시 미국과 이란은 서로 자국에 수감 중이던 상대방 국적자(5명)를 맞교환하기도 했다.
국내 동결된 이란 자금을 테헤란 측에 전달하는 건 한-이란 관계에서 ‘악재’로 여겨져 온 외교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다. 2021년 1월 걸프만(이란에선 페르시아만, 아랍권에선 아라비아만으로 호칭)에서 발생한 한국 선박 나포 사건 같은 ‘잠재적 리스크’를 털어내는 조치다.
당시 이란 혁명수비대는 한국 유조선 ‘한국케미호’가 이란 환경을 오염시켜 나포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실질적 이유는 동결 자금에 있었다. 가뜩이나 외화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돈을 빨리 내놓으라’는 일종의 시위였던 것. 또 미국의 대이란 경제제재에 동참한 나라들에 대한 압박 메시지이기도 했다.
이란 측에서 한국 유조선에 탑승해 있던 선원들에게 해를 가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95일간 억류됐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 등 당시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이란을 방문해 적극적인 설득 작업에 나섰다.
외교 소식통은 “이번 동결 자금 문제 해결은 그동안 소원했던 이란과의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계기다. 특히 한국 입장에선 외교력을 발휘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한 성과”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미국의 입장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강경한 대이란 경제제재를 추진해 오던 미국이 일시적으로나마 입장을 바꾼 것이기 때문이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이 이란과의 관계 개선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왔다.
‘페르시아발 훈풍’은 인구 9000만 명에 가깝고 천연자원도 풍부한 ‘중동의 거대 시장’이 열리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세계 각국의 시선은 미-이란 관계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아직 먼 ‘이란 핵 합의’ 복원
미-이란 사이에 잠시 불었던 훈풍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건 아직 시기상조다. 무엇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 시절(2017년 1월~2021년 1월) 미국이 일방적으로 탈퇴한 ‘이란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 계획)’가 복원되지 않았다.
이란핵합의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재임 기간(2009년 1월~2017년 1월)이던 2015년 7월에 타결됐다. 미국을 중심으로 독일, 프랑스, 영국, 러시아, 중국 등 이른바 국제사회의 주요국이 이란과 맺은 합의였다. 주 내용은 이란이 단계적으로 핵 개발을 포기하면 경제 제재를 푼다는 것.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2018년 6월 이란과의 핵 합의를 무효화했다. 세부 내용이 이란에 지나치게 유리하고, 핵무기 개발을 확실히 포기했는지 검증하는 게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란은 반발했다. 국제사회에서도 트럼프 행정부의 당시 조치에 부정적 평가가 많았다.
핵 합의 무효화는 미국의 대이란 경제제재로 이어졌다. 미국은 이란산 원유 거래를 국제적으로 금지했다. 이란 국가최고지도자(이란은 시아파 성직자가 국가최고지도자이며 그 아래 대통령이 있는 정치구조)의 친위대이며 ‘정부 위의 정부’로 통하는 혁명수비대를 테러 단체로 지정하는 등 강경한 대이란 제재를 발효했다.
미국과 이란 간의 갈등은 2년 만에 봉합되는 것처럼 보였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20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집권한 뒤 미국은 이란과의 핵 합의 복원 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아직 성과가 없다. 외교 소식통은 “한동안 미-이란 협상이 꾸준히 진행됐지만 성과는 없었다. 현재는 협상 자체가 거의 진행되지 않는 상황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2021년 이란 대통령선거에서 보수 강경파인 에브라힘 라이시가 당선되며 이란과 미국의 합의가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 핵 합의에 서명한 하산 로하니 전 대통령은 중도·실용주의 성향의 인사였다.
이란 내부에선 미국과 한 약속을 신뢰할 수 없다는 여론이 여전히 강하다. 또 내년 미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다시 당선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더욱 미국과의 핵 합의 복원을 위한 대화에 소극적으로 나올 수 있다.
40년 넘게 이어져 온 미-이란 갈등
두 나라 사이에 뿌리 깊은 ‘과거 트라우마’도 관계 개선, 나아가 화해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로 꼽힌다. 미국과 이란은 단교한 지 벌써 44년째다. 그만큼 불신과 상처도 깊다.
미국과 이란의 갈등은 1979년 2월 이른바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시작됐다. 이란 이슬람 혁명은 이란의 이슬람 성직자들이 팔레비 왕정을 붕괴시킨 사건이다. 팔레비 왕정은 친미외교와 세속주의를 지향했지만 부정부패로 이란 내에서 원성이 높았다. 혁명으로 쫓겨난 팔레비 국왕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란의 혁명 세력은 미국에 “팔레비 국왕의 신변을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미국은 거부했다.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1979년 11월 대형 사건이 터진다. 이란 혁명 세력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이란 수도 테헤란에 있는 미국대사관을 점거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이란에 거주하고 있던 미국 외교관과 국민 52명이 억류됐다. 이들은 444일 뒤에야 풀려났다.
이란 보수층이 세계 최강대국 미국에 맞선 사건이었다. 이란은 지금도 이 사건을 기념하고 있다. 옛 미국대사관 건물을 기념관으로 활용하며 ‘미국에 맞선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렇게 많은 수의 미국인을 억류한 나라나 단체는 없다.
이란 전문가인 구기연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는 “이란 혁명 세력의 미국인 억류는 미국으로서는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며 “직접적인 무력 충돌은 아니었지만 이란에 대한 반감을 키우는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미국은 1983년에도 이란과 마찰을 빚는다. 레바논의 친이란, 시아파(이란은 이슬람 시아파 종주국) 무장 정치단체인 ‘헤즈볼라’가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 있는 미 해병대 사령부 건물을 공격해 241명이 사망했다. 헤즈볼라는 레바논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정치세력이다. 레바논 남부를 거점으로 활동하며 이스라엘 정규군과 2006년 34일간 전쟁을 벌일 정도로 만만치 않은 군사 역량을 갖췄다. 이란이 직접 감행한 공격은 아니었지만 헤즈볼라는 레바논에서 ‘작은 이란’으로 불릴 만큼 이란과 가깝다. 미국은 이란에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도 참고 있지만은 않았다. 이란과 이라크가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전쟁을 벌일 때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함께 이라크를 지원했다. 2020년 1월 3일에는 이란 혁명수비대 내 최고 엘리트 부대로 통하는 ‘쿠드스군’의 가셈 솔레이마니 사령관을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무인기(드론)을 이용해 사살했다.
쿠드스군은 이란이 주변국에서 진행하는 군사작전을 담당하는 부대다. 그리고 중동 국가들 중심으로 비공식 외교 업무도 담당한다. 쿠드스는 아랍어로 예루살렘을 부르는 말이다. 쿠드스군에는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다시 찾아오겠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솔레이마니를 미국이 직접 제거한 건 이란 핵심 지도층에 대한 경고나 다름없었다. 사건 직후 알리 하메네이 이란 국가최고지도자는 ‘보복’ 의사를 밝혔다. 이란은 솔레이마니가 사망한 지 5일 뒤인 2020년 1월 8일 이라크 내 미군기지 2곳(아인알아사드 공군기지, 아르빌 기지)에 총 22발의 미사일을 발사했다. 작전명은 ‘순교자 솔레이마니’. 미사일 발사 시각은 솔레이마니가 공격을 당한 시각과 같은 오전 1시 20분이었다.
미군기지에 미사일을 퍼붓기 전에 이란은 이라크 측에 공격 계획을 비공식 채널을 통해 흘렸다. 이라크는 곧바로 이를 미국에 알려 미군들은 모두 대피한 상태였다. 이란은 미국과의 확전은 피하며 보복의 의지는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이란의 중동 영향력 확장 움직임 여전
이란의 위험성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안은 핵무기와 미사일이다. 물론 이란은 아직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했다. 대신 고농축 우라늄과 핵무기 개발 기술을 계속 향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사일과 드론의 경우에는 이스라엘과 더불어 중동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갖추고 있다. 이미 이란은 사정거리 2000㎞ 수준의 장거리 미사일을 대거 보유하고 있다. 이란제 드론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수입해 쓸 정도로 기술력이 좋다.
이란의 핵심 영향력은 이른바 ‘시아벨트 전략’에서 나온다. 이란은 1990년대부터 적극적으로 주변 나라 정치와 안보에 개입해 왔다. 정확히는 시아파 종주국인 것을 앞세워 주변국에 개입해 왔다. 시아파 인구 비중이 높으며 경제난과 종교 갈등으로 내부가 혼란스러운 이라크, 레바논, 예멘, 시리아 등의 나라가 대표적이다. 헤즈볼라(레바논), 카타입헤즈볼라(이라크), 후티 반군(예멘) 같은 무장 정치단체들은 모두 이란의 무기와 자금 지원을 받고 있다.
미국으로서는 이란이 시아벨트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못마땅하다. 미국의 중동 지역 우방국들도 이란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 사우디는 물론 아랍에미리트(UAE), 이스라엘은 이란과 사이가 좋다고는 보기 어려운 나라들이다. 이 나라들 모두 이란의 지원을 받는 무장 정치단체들이 활동 중인 나라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거나 인접해 있기 때문이다.
사우디와 UAE는 이란의 드론으로 인해 원유 생산 시설과 공항도 공격받은 적이 있다. 이스라엘도 헤즈볼라와 잦은 충돌을 경험해 왔다.
일각에선 올해 3월 중국 중재하에 이란과 사우디가 7년 만에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기로 하면서 ‘시아벨트에서 이란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이란이 시아벨트 전략을 포기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는 “시아벨트 전략은 이미 성과가 나오고 있고, 그동안 많은 투자를 해서 구축한 실체라 분명한 무기다. 이란 입장에서 강도 조정은 할 수 있겠지만 이를 포기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아직 먼 이란 시장
과거 오바마 행정부 시절에는 핵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란의 시아벨트 내 움직임에 대해선 거의 거론하지 않았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워낙 사우디, UAE, 이스라엘이 민감하게 반응해 왔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향후 이란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시아벨트 전략에 대해서도 비중 있게 언급을 할 가능성이 높다.
2015년 핵 합의가 타결됐을 때는 미국을 중심으로 국제사회 주요국 간 공조가 비교적 원활했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 중국, 러시아의 패권 경쟁과 반목이 극에 달하고 있다. 특히 이란은 미국의 경제제재로 인해 중국, 러시아와 더욱 밀착하는 분위기다.
결국 한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가 열리길 기대하는 ‘이란 시장’에서 큰 변화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건 어려울 전망이다.
물론 미국 대통령선거(2024), 이란의 총선(2024)과 대통령선거(2025)가 변화를 불러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뚜렷한 문제 해결의 모멘텀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이란에 대한 관심을 거두기도 어렵다. 지난해 기준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이란 인구는 약 8855만 명이다. 중동에서 유일하게 1억 명을 넘는 이집트(약 1억1100만 명) 다음으로 많다. 중동 국가 중 인적 자원의 역량이 가장 높다는 평가도 받는다. 원유와 천연가스 매장량은 각각 세계 3위와 2위다. 관광자원도 풍부하다. 페르시아 고대문명 발상지를 중심으로 한 관광지가 유명하다. 중동 나라에서는 드물게 대규모 식량 생산이 가능한 토지도 갖추고 있다. 핵 합의가 타결됐을 때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이란을 주목한 이유다.
한국 기업들의 경우 이란 시장에서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왔다. 건설사들의 활약이 꾸준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전자제품 시장점유율도 이란 전체에서 수위를 다퉜다. ‘대장금’ 열풍 등 한국 드라마가 일찌감치 인정받은 ‘K콘텐츠의 시장’이기도 하다.
잠재력과 과거 성과가 충분하지만, 미국의 경제제재가 확실히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국내기업의 본격적 이란 시장 진출도 위험하다. 이란 시장 진출은 미국의 제재 모니터링 대상에 오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미국, 나아가 글로벌 시장을 상대로 활동하는 기업들은 이란에 본격 진출할 경우 언제든 미국의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다. 국내 주요 수출 기업 중 ‘미국 수출’과 ‘미국 기업과의 거래’에서 자유로운 곳은 많지 않다.
삼성전자 중동지역 법인장(상무) 출신으로 테헤란 근무 경험도 있는 이창섭 한국경제인연합회 자문위원은 “이란 시장만 바라보는 기업이 아닌 이상 여전히 이란 진출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 한국 주요 기업들의 본격적인 이란 진출은 결국 미국의 대이란 경제제재가 해결돼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자문위원은 “이란 기업들은 한국 기업과 협력할 의지가 매우 강하다. 또 사회 전반적으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좋다. 향후 이란 시장 진출에 관심이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꾸준히 현지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시장조사를 해놓을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재계 중동 전문가들 사이에선 한국 기업들이 일본과 유럽 기업에 비해 이란 네트워크 만들기 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계속 제기돼 왔다. 이런 흐름 속에선 이란 시장이 개방돼도 이니셔티브를 일본이나 유럽의 경쟁 기업에 빼앗길 수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