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의 공간
섹스가 일상으로 편입되면 자신과 파트너가 머무르는 공간을 진지하게 둘러볼 때다. 어떤 상황, 어떤 공간이든 섹스만 하면 그만이라는 사람은, 정말 섹스 외에는 당신에게 관심이 없는 인간이다.
“여자 친구가 자취한다고 좋아하는 놈을 제일 조심해야 해.”
오늘 아침에 지인의 페이스북에 갔는데, 위의 글이 업데이트 란에 대문짝만 하게 있었다. 저런 남자는 공짜 잠자리는 물론 공짜 식사를 바라며 여자를 착취할 생각만 가득한 인간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더러운 자취방에 자신을 눕힐 생각만 하는 남자친구라면 하루빨리 관계를 정리하는 게 좋다. 여자친구가 자신의 방에 놀러 오는데 방향제 한 번 뿌릴 생각도 없는 인간관계에서 무슨 대단한 사랑이며 오르가슴을 기대하는지.
공간과 분위기를 따지는 것도 섹스라는 ‘일상’을 더 신나게, 안락하게 즐기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섹스가 평생에 몇 번 없을 이벤트가 아닌, 일상이라면 말이다. 특히 혼자 산다면 더더욱 주위를 체크하자. 피부와 머리스타일, 옷만이 ‘당신’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출발은 당신을 둘러싼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모든 게 시작이다. 키스는 Ok, 잠자리는 No! 라고 철벽을 치는 여성이라도, 오로지 ‘당신’으로 꽉 찬 공간이 지저분하고 형편없으면 상대방도 당신을 우습게 여긴다. 어지러운 공간에서 섹스 분위기를 잡는 것도 쉽지는 않겠지만.
섹스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당신의 내부 아니면 외부다. 속으로 딴생각을 하고 있으니 홀딱 벗은 상대가 당신의 하반신을 흔들어도 상황에 집중을 못 한다. 외부는 알몸을 둘러싼 모든 공간이다. 작게는 베개부터 크게는 방 전체. 마음에 드는 곳이 전혀 없는 공간에서 만족할 만한 섹스를 기대할 수는 없다.
몇 해 전에 친구가 남자친구와 쿠바 하바나로 여행을 갔다 왔다. 평소 마음 내킬 때 훌쩍 떠나는 친구라 역시나 아무 준비 없이 왕복 비행기 표만 달랑 들고 저녁에 하바나에 도착했는데, 가는 호텔마다 모두 방이 없다고 해서 당황했단다. 수소문해서 방이 딱 하나 남은 호텔에 갔는데, 쾌쾌한 냄새와 더불어 50년은 갈지 않은 것 같은 침대 시트가 공포심마저 들게 했다고. 침대 끝에 살짝 앉았는데, 축축한 느낌 때문에 결국 3초 만에 스프링처럼 일어섰단다. 그렇게 밖으로 나왔는데 마침 호텔 앞에 있던 어느 삐끼를 따라 간 B&B로 잠자리를 바꾸고 나서야 두 다리를 뻗을 수 있었다나. 소울 메이트라고 생각한 남자친구와 이국적인 밤을 꿈꾸며 여행을 떠난 건 좋았는데, 엉망인 침실 때문에 산통 다 깨진 케이스다.
여하튼 우리가 호텔이나 모텔을 섹스 공간으로 선택하는 이유는 깨끗하게 정돈된 침대와 향기로운 공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이상의 비용을 투자하면 거의 반드시 보장받는 설정. 눕고 싶은 마음이 드는 곳에서 오르가슴도 쉬이 온다. 그러니 상대방의 가치관이나 신념이 나의 파장과 일치하는지 않는지 같은 문제를 고려할 필요가 없는 관계에서는 계속 바깥으로만 나돌아 다녀도 괜찮다. 하지만 가끔은 상대방을 알기 위해 자리를 펴고 마라톤 대담을 하는 것보다 자신의 공간으로 초대하는 게 더 확실할 수도 있다.
“완벽하게 정돈된 공간에서는 파괴 욕구가 일지 않냐?”
건축을 전공한 L과 사귈 때였다. 큰 맘먹고 그를 우리 집으로 초대했는데, 내 방식대로 정돈한 책장의 책을 이리저리 옮겨 꽂으며 그러는 거다. 초록색으로 맞추어 놓은 칸 제일 위에 놓인 마돈나 자서전 위에 갈색 <논어>를 멋대로 올려놓으며 말이다.
자긴 무질서한 공간에 있을 때 상상의 여지가 있어 마음이 편하다며 L은 애써 정리한 남의 공간을 허락도 없이 어질렀다. 이런 남자를 위해 지난 삼일 간 속옷을 연어색 브라세트로 맞출까 아니면 블랙 레이스 끈팬티를 입을까 고민한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남의 책장을 신나게 들쑤시는 남자를 지켜보는 내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은 오직 한 가지 – 넌 오늘 밤 이후로 아웃. L은 자기가 차인 이유가 책꽂이 순서 때문이라고는 아마 꿈에도 모르리라.
물건이 어떤 자리에 어떻게 놓여있느냐는 내가 공간과 대화를 하는 방식이다. 모든 건 에너지다. 내가 판단할 때 이상한 곳에 놓인 물건이 여기저기 있는 공간에 있으면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인테리어가 깔끔하다고 해서 기의 흐름이 다 좋은 것만도 아니라는 걸, 경험으로 안다.
침대 머리맡과 창가만 제외하고 거울로 된 모텔 방에서 섹스를 한 적이 있다. 내 취향대로 모던하고, 무척 깔끔한 곳이었지만 사방이 거울, 특히 천장에도 거대한 거울이 붙어 있어서 남자의 아래에 깔려 있을 때도 도통 섹스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피스톤 운동에 열중한 남자의 엉덩이를 그렇게 생생하게 보긴 처음이었다. 마치 지미집 카메라로 실시간 포르노를 보는 것 같아 시선이 계속 천장의 영상에 홀렸다. 급기야는 누워서 ‘팔을 이렇게 들어 올리니까 훨씬 날씬해 보이네’ 하고 이것저것 거울을 통해 자세를 점검하는 여유까지 부릴 정도였다.
침실은 침실로만 존재해야 한다. 침실이 따로 없는 원룸이라면 침대는 철저하게 ‘침대’로만 남겨두자. 책을 읽는 곳으로, 인터넷을 하는 곳으로, 간식을 먹는 곳으로 등등 보살펴야 할 것이 많은 침실에서 대단한 오르가슴을 기대하는 건 반칙이다.
경험 상 이 중에서 가장 나쁜 버릇은 음식을 침대에서 먹는 것이다. 헤드보드에 기대서 초콜릿을 먹다가 창가 옆에 개미떼가 한 줄로 줄지어 가는 것을 보고 기겁한 뒤로 침대에서 음식은 절대 먹지 않는다. 침대에서 휴대폰을 만지작하는 것도 삼가야 하지 않나 생각하던 찰나에 어떤 휴대폰은 변기의자보다 세균이 많다는 리서치 기사를 보고 눈물을 머금고 침대 아래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사실 이 모든 잡스러운 일을 침대에서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잠이 오지 않아서 그렇다. 몸이 피곤하지 않아서다. 그렇다고 숙면을 위해 밤늦게 동네 한 바퀴를 뛰고 오는 건 상상만 해도 귀찮아. 몸을 기분 좋게 피곤하게 만드는 최고의 방법은 역시, 섹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