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버금갈 광역도시 만들기, 국가 전략 삼자
지난 호에서 ‘저출산 재앙론’에 대한 인식 전환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번 호에서는 이른바 ‘지방소멸론’에서 나타나는 진단과 처방이 적절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지방소멸론’은 그 명칭이 갖는 자극적 특성 때문에 기사 제목에 뜨면 읽지 않고 지나기 어렵다. 지방소멸 논의의 일반적 흐름은 ‘지방이 차례차례 소멸하고 있고, 상황을 방치하면 국가 소멸에 이르게 되므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식이다. 대책으로 거론되는 내용은 어떻게 농촌의 출산율을 높일 것이냐, 도시의 청년을 어떻게 농촌으로 이주시킬 것이냐, 관광자원을 특성화해 유동 인구라도 늘릴 것이냐 등에 머물러 있다.
절대 인구가 감소하고 수도권으로 젊은 인구가 지속 유출되는 양상이다. 과연 농촌에 스마트팜을 지어주고 젊은 세대에 농촌 가서 영농에 종사하라고 예산을 지원한다고 해서 농촌인구가 다시 늘어날까. 여기에 ‘고향세’ 도입, 도시민이 농촌 가서 살아보기, 제2의 고향 만들기 등의 대책까지 더하면 일본이 시행한 정책의 판박이에 그칠 것이다.
위 대책 중 하나라도 성공시키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성공한다 해도 단순하고 즉각적인 대증요법(對症療法)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점은 명확해 보인다. 자원을 대량 투입해 일시적으로 개선된 것처럼 보이게 하거나, 운 좋게 예외적 성공 사례가 나와 지자체나 중앙부처의 치적 발표용 자료로 쓰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위와 같은 대책으로 사회경제 구조의 거대한 변화를 멈춰 세울 수 있을까. 지방이 원래 갖고 있던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특징을 되찾을 수 있을까.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2021년 국토연구원 보고서 통계에 따르면 2000∼2020년 사이 20년간 인구가 감소한 시·군·구는 151곳(66%), 인구 정점 대비 20% 이상 인구가 줄어든 시·군은 60곳이라고 한다. 전국 228개 시·군·구 기준 소멸위험지역은 2019년 5월 93개(40.8%)에서 2023년 2월 118개(51.8%)로 증가했다. 행정안전부는 2021년 인구감소지역으로 89곳의 지자체를 선정했고, 2022년부터 10년간 매년 1조 원의 ‘지방소멸대응기금’을 투입하는 동시에 총 52개, 2조5600억 원 규모의 국고보조사업도 벌인다고 한다. 인구 늘리기가 쉽지 않은 지자체는 추모공원, 교도소 등 기피 시설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는 그동안 출산장려금, 아동수당, 귀농귀촌 서비스, 정착지원금 등으로 많은 재정을 투입했지만 외려 인구 감소와 지방소멸 위기는 가속화하고 있다.
‘지방소멸’이라는 용어와 개념은 일본에서 2014년 발간된 ‘마스다 보고서’에서 본격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했다. 이와테현(岩手県) 지사와 총무대신을 지낸 마스다 히로야(増田寛也)는 민간 연구단체 소세이카이(創成会)를 통해 위 보고서를 발간했다. ‘마스다 보고서’는 이후 수정, 보완을 거쳐 ‘지방소멸(地方消滅)’이라는 책으로 일본에서 출간됐고, 2015년 같은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 출판됐다.
보고서 내용에 충격을 받은 일본 정부는 2015년부터 지방소멸 대응책으로 이른바 ‘지방창생(地方蒼生)’ 정책을 수립, 실시하고 있다. 총리 직속으로 ‘지방창생본부’라는 기구까지 설치했다. 일본 일각에서는 이론의 근거가 부족하다거나 지방의 다양성을 무시했다는 등의 비판이 나오기도 했지만 ‘마스다 보고서’는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지방소멸론’을 비판적으로 관찰할 필요도 있다. 첫째, 인구 감소의 결과로 수반될 수밖에 없는 지방의 사회경제적 위축을 마치 새로 등장한 문제인 것처럼 과도하게 포장해 인식하게 할 여지가 있다. ‘지방소멸론’이라는 명칭 자체가 현상에 초점을 맞추는 터라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둘째, 도시와 농촌 간 삶의 질과 기대소득의 격차가 계속 커지고 있기 때문에 농촌에서 도시, 특히 수도권 인구 집중 현상을 완화하기란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더 나은 생활 여건을 찾아 이주하는 것은 경제사회적 여건을 고려하면 자연발생적 추세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지방소멸론’에는 농업 시대가 아닌 지금에 와서도 과거의 인구 분포를 정상 상태(normal)로 상정하고 농촌인구 감소, 도시인구 증가라는 자연스러운 변동을 새로운 기준(new normal)으로 수용하지 않으려는 전제 또는 고정관념이 엿보인다.
‘지방소멸론’에서 진단한 현상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국가적으로 절대 인구가 감소하는데 고령화 속도가 도시보다 농촌에서 너무 빠르다는 점이다. 둘째, 그나마 남아 있던 농촌 청년인구의 도시, 특히 수도권으로의 유출이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편의상 위의 첫째 요인, 즉 절대 인구의 감소 현상을 1차 충격, 둘째 요인, 즉 청년인구의 외부 유출을 2차 충격이라고 표현하겠다. 우리가 보유한 자원과 수단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지 짚어봐야 실효성 높은 대책을 세울 수 있다.
따져보면 절대 인구가 감소하지 않는다손 쳐도 수도권으로 상대적 인구 유출이 가속화하는 것을 막기 어려운 현실이다. 즉 1차 충격이 없이 2차 충격 자체만으로도 막기가 어려운데 1차 충격 위에 2차 충격이 더해지는 상황에서 내놓는 대책이 실질적 효과를 내리라고 기대하기는 더욱 어렵다. 특히 1차 충격, 즉 절대 인구의 감소 추세를 역전시키는 것을 ‘지방소멸’에 대한 대책으로 내는 건 현실성이 떨어져 보인다. 다만 2차 충격, 즉 농촌 청년인구의 수도권 유입에 대해서는 우리가 접근하기에 따라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다른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을 극복하고 관점을 바꿔 현실을 볼 필요가 있다. 큰 변화의 흐름이 있을 때 과거의 기준만을 정상으로 인식하고 과거 방식을 고수하면 새로 나타난 흐름과 역행하는 대응 방식을 내놓기 마련이다. 이와는 반대로, 변화의 흐름에 순응하면서 새로운 시대와 환경에 맞게 새로운 틀을 짜는 기회로 이 흐름을 활용하려는 대응 방식을 찾을 수도 있다. 당연히 전자보다는 후자를 택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인구 감소와 지방소멸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맞서고 이를 거스르는 데 쓸만한 재정 여력과 시간이 충분히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연재에서는 앞선 주제인 인구 감소와 그 결과 중 하나인 지방소멸 현상에 대해 비관적이거나 회의적이 아닌,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자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잠시 아래와 같은 방법을 활용하고자 한다. ‘지방소멸의 종착역은 국가소멸’이라는 전통적 관점으로 보면 지금 우리는 국가소멸 위기에 직면해 있다. 즉 국가의 생존이 걸린, 다시 말하면 전쟁과 같은 상황에 처한 셈이다. 실존하는 적군이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이 전장(戰場)을 ‘생존을 위한 자신과의 투쟁의 장’이라고 정의하고 전투에서 사용되는 전술 개념을 빌려와 상황에 대입해 보겠다. 이렇게 하면 새로운 관점을 형성하고 해법을 도출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다. 다음은 일반적인 전술 해설의 일부다.
1차 방어선은 상대와 가장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전선으로, 2차 방어선은 후퇴하고 조직적으로 다시 응집하고 대비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1차 방어선이 상대의 강력한 공격으로 뚫리거나 위험에 처한 경우, 방어 측은 후퇴를 결정할 수 있다. 후퇴는 단순히 전선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닌, 2차 방어선이나 뒷지역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고 거기서 다시 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후퇴는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방법으로 전선을 뒤로 물러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후퇴할 때 방어 측은 혼돈을 피하고 병력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적절한 시기와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후퇴한 병력은 2차 방어선에서 다시 전술적으로 응집하고 재편돼 상대의 다음 공격을 대비한다. 전술적으로 1차 방어선과 2차 방어선은 방어 측이 유연하고 효율적인 방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요소다. 이런 전술적인 접근은 전투에서 전략적 이점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른바 ‘소멸’의 파도가 먼저 엄습한 지역을 1차 방어선, 비수도권의 권역별 중핵 역할을 담당할 주요 광역시를 2차 방어선이라고 상정하자. 현재 상황은 1차 방어선이 이미 무너졌거나 곧 무너질 텐데, 이에 대해 기존 방식으로 버티며 안간힘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 실효성이 부족한 대책을 나열하고 실행을 못 하다가 2차 방어선까지 속절없이 다 무너질 수도 있다. 무너진 1차 방어선에서 전략적으로 후퇴하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다가온다.
위의 전술 해설에서처럼 1차 방어선에서 후퇴한다고 해서 전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2차 방어선으로 물러나서 이것을 새로운 기반으로 삼고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권역별로 광역시 중심으로 재집결해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필요가 있다. 젊은 세대가 수도권으로 이주하려는 이유는 교육, 의료, 문화 등 삶의 질을 좌우하는 여러 분야에서 수도권과 여타 지방의 격차가 갈수록 너무나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농촌의 평균연령이 68세를 넘어가는 현실에서 언제까지 무너지는 방어선을 지킬 수 있을까.
한편 2차 방어선 구실을 해야 할 광역시의 현재 사정은 어떠한가. 각 지역 언론에는 ‘수도권으로 청년인구 유출 역대 최고’ ‘무너지는 지역 대학’ ‘취업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다’ ‘연봉 3억6000만 원에도 의사를 못 구한다’, 그리고 농촌 지역과 다를 바 없는 ‘자치구별 소멸 시점 예측’ 같은 기사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온다. 즉 지금과 같은 상태로는 광역시 자체의 생존도 쉽지 않다.
그렇다면 발상을 바꿔야 한다. 광역도시의 역할을 강화해 광역시 주변 농촌 지역 노령인구의 장기요양 및 복지 기반 확립, 교육과 산업의 연계망 구축, 거점 국립대 및 국립대병원에 대한 대대적 투자, 수도권 못지않은 문화시설의 확충에 나서는 것이다. 지방 어느 권역에 살든지 서울과 교육, 의료, 문화시설 및 취업할 만한 기업의 분포에서 큰 차이가 없는 거점도시 기능을 광역시가 확보하게 하는 것이 현재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방법 중 성공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방안에는 부작용도 따를 것이다. 거점을 중심으로 더욱 집중시켜야 하기에 단기적으로는 거점이 아닌 지방의 소멸 속도가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농촌 지역을 우대해 집행하던 예산을 도시 지역 각종 인프라 강화에 집중적으로 투입하면 불균형·불평등·차별 등의 이슈가 대두할 수 있다. 하지만 도시화에 수반되는 집적효과로 인한 사회경제적 편익의 상승은 이미 의심의 여지없이 입증된 바 있다.
이를 위해서는 광역시가 명실상부하게 해당 권역의 중심이 돼야 한다. 광역시와 그 뿌리에 해당하는 각 도(道)가 통합하는 지방행정체제 개편, ‘소멸 위기’ 단계로 접어든 기초단체의 통합 및 광역화, 이에 따르는 행정 서비스 개편 방안, 농촌 우대 정책으로 건국 이래 틀을 한 번도 제대로 바꾸지 못한 지방행정교부세 배분 체계와 방식의 변경 등 많은 과제를 함께 다뤄야 할 이유다.
지방소멸론이 먼저 대두한 일본에서도 장기 집권 중인 자민당의 득표 기반인 농촌의 이해관계를 다루는 정책과 예산을 건드리기 어렵다. 유럽의 많은 나라도 농민 표를 의식해 농업과 농촌에 관한 정책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정치적 이유로 농촌 정책에 손을 대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국토와 인구 여건을 고려할 때 싱가포르처럼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는 서울 중심의 도시국가를 지향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면, 그야말로 소멸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국토의 거대한 재구조화가 필요하다. 광역시 주거 여건을 서울에 버금갈 정도로 끌어올리는 것을 국가 전략으로 검토해야 한다.
그렇다고 농촌을 완전히 공동화하자는 취지는 전혀 아니다. 이제 육체노동이 필요한 분야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아직 자동화의 진척 정도가 높지 않아 외국인 근로자들이 농촌 고령화로 인한 일손의 공백을 메우고 있으나, 아마도 한시적 대안이어야 할 것이다. 이는 자동화 및 이민 문제와 연결되는데 이후에 다시 살펴보겠다.
우리 헌법을 제정할 당시에는 농업국가로서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이 타당했으나, 다음 번 개헌이 있을 때에는 이제 우리가 농경시대나 농업국가를 벗어난 만큼 이 조항의 개정이 검토돼야 한다. 극심한 기후변화로 인한 재해와 병충해 가능성의 증가로 노지(露地) 농업의 난도나 비용은 계속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 향후 수십 년을 대비한 농업과 농촌 정책에서는 농업의 자동화, 실내화, 도시화의 추세를 예상해야 할 것이다.